그런데 그 날이 무슨 날인데?
장면 하나. 노 키즈 존. 개와 어린아이는 출입 금지. 서울 인근 모 카페에 붙어 있는 경고문이다. 어린이는 이 카페에 들어갈 수 없다. “애들 들어오면 소리 지르고, 어지럽히고 정신없고 다른 손님들 컴플레인도 많아서” 카페 출입을 금지했단다. 이런 곳 한둘이 아니다. 어린이는 공공의 적이다.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어린이 손님들이 들어오면 근육 먼저 굳는다. 또 시작이다 싶어서.
장면 둘. 정부는 나서서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쉽게 정리하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고령화 사회다. 노동할 젊은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그 말은 정부가 거둬들일 세수 역시 줄고 있다는 말이다. 출산율을 높여야 노동 가능 인구가 늘어난다. 어린아이는 소중한 인적자원이다. 짧게는 가정을 먹여 살릴 일꾼, 길게는 나라를 유지케 할 일꾼. 대부분의 시간을 학원과 영어유치원에서 보내야 하는 이유는, 사실 그 때문이다.
장면 셋. 한동원 영화평론가는 한겨레에 실린 그의 칼럼을 통해 <주토피아>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어린이는 이 사회를 알 리가 없으니 이것을 어린이가 관람할 수 있도록 ‘전체관람가’ 등급을 붙이는 것을 잘못됐으며, 어린이가 이 영화를 보게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토피아>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을 위한 영화이다.
태초에 어린이날이 있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천도교소년회의 어린이날 선포로부터 94주년, 조선소년운동연합의 어린이날 선포로부터 93주년이 되는 날이다. 100년이 가까운 시간이다. 강산이 열 번은 더 바뀔 시간이다. 그러나 어린이를 바라보는 사회의 관점은 94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첫 번째 어린이날 행사를 열어 이렇게 선언했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에 대한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십사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는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 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린이를 존중하자는 얘기다. 이 간단한 요구는 오늘날 글자 그대로 반복돼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장면 1) 어린이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장면 2)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것 같지도 않다. (장면 3)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사회적 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다. 아니, 심지어 거기서 어린이들을 내쫓으려는 이들마저 있다.
차별이 있으라 하지도 않았는데
어린이에 대한 차별은 이런 식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차별이라는 의식조차 없이 행해진다. 어린이에게 어떤 장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어린이를 미래에 세금을 낼 인적 자원으로만 보는 것, 그리고 어떤 영화를 어린이가 볼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
이는 차별이다. 여기에 어린이 대신 흑인, 여성, 성소수자나 무슬림 등의 단어를 넣어보면 이것이 왜 차별인지가 더욱 명백해진다. 하지만 어린이에 대한 모든 차별을 정당화하는 마법의 단어가 있다. 미성숙. 어린이는 미성숙하기 때문이다. 미성숙하기에 출입을 금지할 수 있고, 미성숙하기에 미래에 사용될 자원으로 인식되고, 미성숙하기에 어떤 영화를 봐서도 안 된다. 미성숙하기에-.
옳은 논리인가. 미성숙하기에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정당하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런 질문에는 무엇이라 답할 수 있는가. 모든 어린이는 미성숙한가. 그렇다면 성숙하지 못한 어른은, 성숙하지 못한 노인은 어떻게 구분할 것이며 어떻게 금지할 것인가. 매년 국가공인성숙자격증이라도 따둬야 하는 것 아닌가. 미성숙한 어른은 넘친다. 나이에 따라 성장하는 사람은 드물다. 결국, 이도 편견에 불과하다.
94년 이제는 달라져야 할 때
94년이 지났다. 바뀌어도 무언가 바뀌었어야 할 시간이다. 혹자는 그때의 삶과 지금의 삶을 비교하며 지금의 어린이들이 더 살기 좋지 않냐고 물을지 모른다. 일제시대보다 지금이 더 나을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는 근본적으로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어린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때나 그냥, 애일 뿐이다.
천도교소년회는 1922년 첫 번째 어린이날 행사를 열어 이렇게 선언했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에 대한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십사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는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 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또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히지 말아주십시오.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이야기 하여 주십시오.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주십시오. 장가나 시집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어려운 요구가 아니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선물보다는, 존중을 주고받아야 할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