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 수강신청의 계절이 돌아왔다. 대학생들은 시간표를 짜고 수강신청 때 자신의 시간표대로, 바라는 수업의 수강신청에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타이머를 비롯한 수많은 방법으로 실패의 확률을 낮추고, 또 실패를 한다고 해도 손실을 가능한 한 줄이려고 한다. 정해진 시간에 느리고 한정된 서버와 수많은 경쟁자들을 뚫고 들어가 원하는 수업에 터치다운하는 수강신청이라는, 어찌 보면 경쟁의 끝이자 비효율의 끝이기도 한 이 시스템은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스템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딱히 내 수강신청이 망하거나 18학점 중 9학점을 날려버렸거나 해서가 절대 아님을 미리 알려드린다.
아 수강신청이 망했어요 ⓒ MBC
대학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수강신청
대학생들은 수강신청을 통해 원하는 수업에 들어가고, 한 학기 동안 그 수업을 듣는다. 한 학기마다 수강신청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혹은 얼마나 성공했느냐 하는 것은 짧게는 해당 학기, 길게는 자신의 대학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수강신청은 정말 절대적인 힘을 지닌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이 수강신청이라는, 정확히는 지금의 형태를 가진 수강신청 시스템이 과연 온당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학생들은 수업을 비롯한 학교의 여타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해 사립대 기준 한 학기에 300~400만원도 훨씬 더 넘는 등록금을 비용으로 지불하고 있다. 즉, 학교와 학생은 (주로) 교육이라는 서비스와 등록금이라는 재화를 교환하는 관계에 있는 것인데, 관계의 주도권은 늘 서비스의 제공자인 학교에게 있다. 여기에는 학교의 이름이나 교수의 명성 등 여러 외부요인이 복잡하게 작용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학생은 학교가 정한 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학교가 짜 놓은 시스템에 따라 학생들은 교육이라는 서비스 제공의 기회를 얻기 위해 아침부터 일어나 컴퓨터나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또 같은 입장인 다른 학생들과 경쟁해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그 선착순 경쟁에서 일찍 일어나 수강신청이라는 벌레를 잘 잡은 얼리 버드(Early Bird)는 한 학기를 순탄하게 보낼 수 있는 것이고, 조금이라도 늦은 새는 벌레는커녕 학 학기 계획을 새로 짜야 하는 고난에 휩쓸리게 된다.
비용으로 지불하는 돈이 얼마냐 하는 문제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수강신청 버튼 클릭을 조금 늦게 했다고, 혹은 사이트에 조금 늦게 접속했다는 이유로 ‘선착순에서 밀렸다.’ 는 말과 함께 교육받을 권리를 사실상 박탈당하는 것은 공정하다고 말하기에는 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제공받기 위한 비용과 해당 서비스가 균등하게 교환되지 않고, 같은(혹은 비슷한) 비용을 지불함에도 서비스를 받을 기회가 수강신청에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박탈당하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두 학생이 수강신청 창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 <아수라>
‘진흙탕 싸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강신청
이 수강신청이라는 제도에 백 번 양보해 공평함 비슷한 것이 있다고 해도, 애초에 바람직하지 않고 불필요한 ‘경쟁’을 만들 거라면 그 경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프라가 마땅히 조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학교 서버를 확충한다던가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꽤 많은 경우 학교의 서버는 참으로 소담하고 소박하기 그지없기 마련인데, 가뜩이나 느린 학교 사이트가 수강신청 기간에는 아예 클릭도 힘들 정도가 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수강신청 기간이 아닌 평소에는 대부분의 학교 사이트에 사람이 몰릴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일종의 합리성에 기반해 서버를 늘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서버를 좀처럼 늘리지 않는 것일 것이다.
잉푸라가 중요하니까… 그러기 위해선 돔 구장이… ⓒJTBC
하지만 달나라도 가는 21세기, 그것도 속도가 초당 100메가바이트 이상 나온다는 자칭 인터넷 강국에서 이런 일로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인터넷, 아니 홈페이지가 렉 걸리거나 버벅거리면 그렇게 한 학기를 자신이 별로 원하지 않는 수업을 들어야 하거나 수업 들을 권리 자체를 박탈당하는 경우 또한 옳지 않다. 학교 측은 늘 합리성을 이유로 서버 확충 또는 다른 대안의 모색을 사실상 거부하곤 하는데, 충분히 서로 불리한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될 수 있음에도 합리성 또는 학교의 편의를 위해 수강신청의 대상 모두가 진흙탕 싸움을 해야만 하는 상황 또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안전망 없는 승자 독식의 시스템
수강신청은 전형적인 Winner takes it all, 즉 승자 독식의 시스템이다. 성공한 사람은 다른 고민을 할 필요 없이 자신이 신청에 성공한 수업을 잘 들으면 되는 것이고, 실패한다면 비슷한 전공이나 관심사의 다른 수업을 찾아 다니거나, 그것도 실패한다면 한 학기를 그대로 망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강신청의 실패를 오롯이 그 실패한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에 대해서 어떠한 (학교 혹은 사회 차원의) 안전망이나 구제 시스템 없이 모든 책임을 수강신청에 실패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매우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처사이다.
물론 그렇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자신의 (외부요인 가득한) 실패가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수강신청을 희망하는 과목들을 미리 담아두었다 편하게 신청할 수 있는 수강바구니라는, 그렇게 오래되지만은 않은 시스템이나 그런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시스템들이 경쟁에 있어서 일종의 도구로서 작용하긴 하지만, 그것이 수강신청의 성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고, 경쟁에서 실패했을 때 안전망 역할은 더더욱 해주지 못한다.
총장님… 수강신청에 마지막 기회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 <아수라>
이러한 수강신청의 한계점을 어느 정도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이나, 고전적인 철저한 선착순 수강신청 방식에서 벗어난 수강신청 제도들 또한 존재한다. 주어지는 수강신청 마일리지를 듣고 싶은 과목의 우선순위에 따라 분배해 신청하는 수강신청 마일리지 제도가 있고, 한 과목에 수강을 신청한 학생들이 정원보다 많을 경우 추첨을 통해 수강 인원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학년별로 수강 정원을 다르게 두는 경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제도이고 말이다. 또 고전적으로 자신이 수강하고 싶은 과목을 종이에 적어 학교에 접수하는 고전적인 방법을 여전히 사용하는 경우 또한 있다.
외국의 경우도 별반 다를 것은 없는데, 예컨대 일본 같은 경우는 추첨제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고,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는 종이에 적어 접수한 후에 신청이 되었는지 혹은 정원이 초과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매우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존재한다. 한국과 비슷한 수강신청의 방법들을 다른 나라의 대학교들에서도 사용하는데, 한국에서 수강신청의 방법이 추첨이나 마일리지 등 어느 정도 케이스-바이-케이스(case-by-case) 인 것처럼 외국의 경우도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 없어 이 식빵 ⓒ <아수라>
수강신청 제도의 근본적 한계점들
어쨌든 작금의 수강신청 제도가 지닌 근본적 한계점은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에 대한 안전망이나 대책이, 혹은 경쟁의 인프라가 한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즉 학생들에 대한 복지가 없다는 것인데, 이는 국가의 복지정책 등을 빌려와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강신청과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현대의 복지국가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대개 경쟁을 함께 할 여력이 안 되거나 경쟁에서 밀려난, 혹은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구성원들에게 그 불리함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구성원들의 ‘사회에서 밀려나지 않을 권리’를 존중하고, 해당 구성원들이 탈락하도록 만들지 않기 위해 기본소득이나 소수자 우대 정책, 사회적 보험이나 연금 등의 복지 정책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국가가 기울어진 현실의 운동장에서 (특히 낮은 계급의) 구성원들이 탈락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버팀목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는 정부가 그 복지를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을 학교 차원으로 가져온다면, 그 역할은 학교 당국에게, 더 높게는 교육 당국에게 돌아간다. 이 진흙탕 싸움 같은 별로 의미 없는 과열된 경쟁의 완화를 담당해야 하고 구성원들이 사회에서 밀려나는 것을 방지하는, 일종의 복지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강신청에 있어서, 더 넓게는 학생 구성원들에 대한 학교와 교육 당국의 복지는 꽤나 여러 종류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편적으로는 학교의 서버나 트래픽을 확충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학생들이 조금 더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의 질과 양을 확충하는 것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요즘 늘어나다 못해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구조개혁사업 등에 따라 기존의 수업들을 대신해 만들어진 이른바 ‘비즈니스 프랜들리’ 한 수업들이) 예컨대 수강신청이 몰리는 교양이나 전공 수업들의 수강인원 수를 늘리거나, 그와 비슷한 수업들과 그 수업을 담당할 교수 등을 확충하는 것이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면 경쟁에서 실패해 밀려나는 것에 대한 리스크가 자연스레 줄어들 것이고, 학교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만족도 또한 올라갈 것이다.
예산이 ENKKO가 나 부렸당께요? ⓒ <아수라>
아무래도 여기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바로 예산 문제다. 국가 차원에서도 복지 실현을 위해서는 꽤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복지의 확장 혹은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논리 중 가장 단골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돈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학교도 비슷할 것이다. 돈 때문에, 합리성 때문에 학교는 마치 학교처럼 그러한 복지 인프라 자체의 확충을 거부하거나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곤 한다. 하지만 많은 사립대의 경우 적립금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정도로 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교육연구소가 지난해 6월 17일 발표한 ‘2010~2014사립대 적립금 분석 자료’에 따르면 전국 4년제 사립대 중 절반 가까이에서5196억 원의 적립금이 는 반면, 학교나 재단이 학생들에게 들이는 복지의 규모는 별반 달라진 게 없는 수준이다. 오죽하면 몇 년 째 수강신청 날만 되면 학교에 대한 성토가 SNS 타임라인을 여전히 뒤덮을 정도이니 말이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면
어찌 되었건 수강신청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짧게는 한 학기, 혹은 길게는 대학생활 전반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잘 풀리면 즐겁고 유익한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이고, 자칫 한 번 잘못 꼬이면 졸업할 때까지 시간표나 학점이 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강신청 기간이 되면 대학생들은 우스개 섞인 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데, 이러한 건곤일척의 경쟁, 그것도 외부요인 가득한 경쟁을 ‘타이밍’과 ‘운’ 따위의 알량한 것에 기대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참으로 웃기도 한 편으로는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의 수강신청 제도를 들여오는 것은 어떨까?” 라고 하기에도 별반 다를 것은 없어 보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전반적인 개선이라고 생각한다.
잘 아시는 지 모르겠지만, 대학이 돈이 없잖아요. ⓒ KBS1
대부분의 사립대가 가진 적립금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사립대건 국립대건 “학교가 돈이 없다.” 라는 말은 이미 아무도 믿는 이가 없는 말이 되었다. 그 반면 학생에 대한 투자나 의사 반영이 지지부진하다는 성토는 점점 커지고 있고 말이다. 학교가, 그리고 교육 당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덩치를 불리는 것보다 교육 당사자들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 사회적 안전망과 복지를 제공하는 것일 것이다.
진정 그들이 교육을 ‘백년지대계’로 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