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ing, ‘싸움’ 혹은 ‘힘 내’
파이팅(fighting), 원래 뜻은 ‘싸움’ 일 테지만, 한국에서는 –그러니까 콩글리시적 용례로는- 대개 ‘힘 내.’ 의 뜻으로 쓰이곤 하는 말이다. 한국 사람들이 힘 내라는 말을 굳이 ‘Cheer Up!”이 아니라 “Fighting!”으로 쓰는 것은 어찌 보면 하루하루 사는 게 투쟁이고 전쟁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구태여 가져다 붙이자면 여기를 두고 괜히 ‘헬조선(Hell+조선)’ 이라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파이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해야 한다는 것과 연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도 부디 살아남으라는 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뉘앙스는 조금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은 ‘파이팅’ 이라는 말도 같은 처지의 사람이 할 때와 한참 다른 처지인 사람이 할 때의 느낌은 사실 사뭇 다른데, 거기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계급 혹은 계층 문제가 더해진다면(사실 이 문제들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 느낌은 더욱 크게 달라지게 된다.
상위 계급에 속한 이들이 이야기하는 ‘파이팅’ 은 아무래도 근면과 성실,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말이다. 예컨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의 수공(水攻) 위협에 맞서 ‘파이팅’ 있게 성금을 모아 평화의 댐을 건설하자는 말이나 1997년 IMF 사태 때 국가가 망했으니 ‘파이팅’ 있게 국민들이 가진 금을 기부하라는 말에서의 ‘파이팅’은 국가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돌리고 그들의 희생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만한 말이기도 했다.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고요?
지난 5월 취임한 안양옥 신임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은 7월 4일 재단 운영 구상을 밝히며 대학생이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방법이랍시고 국가장학금 제도의 축소와 ‘소득 분위에 상관 없는 무이자 대출’을 언급하며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 고 이야기했다. 아마 채무가 일종의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 한 이야기일 것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생각은 틀렸다.
무엇보다 채무는 동기부여의 수단이 아니라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학생에게는 더 그렇다. 많은 수의 대학생이 학자금 대출을 못해도 수백, 많으면 수천 만원까지 가지고 있고 생활비 대출 등 학자금 외 대출을 가지고 있거나 가진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극단적으로는 학업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기도 한다.
교육부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학자금대출을 받은 누적 인원은 326만 명 정도이고, 그 금액은 14조 8천억여 원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리고 ‘반값등록금 실현과 교육공공성 강화를 위한 국민본부’의 성명에 따르면 학자금 대출 채무를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는 청년이 2015년까지 19만 6822명이고, 소송을 당한 사람은 약 1만 1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또 ‘학자금 푸어(poor)’ 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학자금 대출은 많은 대학생에게 동기 부여의 수단이기는커녕 속박이고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등록금은 미래의 내가 내겠지.” 라는 속 쓰린 우스개처럼, 대학생들은 더 이상 저당 잡힐 것 조차 없어 ‘미래’를 학자금에 저당 잡혀 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 아니 해야만 한다. 하지 않으면 일할 기회, 사회에 나가 햇빛을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학비 마련하기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
안 이사장의 이야기는 동시에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부모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립심’을 키우는 차원에서, 자신이 대출을 받고 그것을 ‘스스로’ 갚아 나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 스스로 학비를 벌고 빚을 갚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등록금은 말도 안 되게 높고, 그에 비해 수입의 기준선인 최저임금은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한국의 4년제 사립대 중 문과계열 한 학기 등록금은 대략 300만원 대 중반에서 형성되곤 하는데, 최저임금은 2016년 기준 시간당 6030원, 월급(209시간 기준)은 126만 270원 원이다. 이 돈으로 등록금을 부담할 수야 있다. 자취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먹지도, 핸드폰을 이용하지도, 어딘가로 이동 하지도,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지도 않고 오로지 ‘숨만 쉬고’ 산다면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숨만 쉬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 때문에 한 시간에 6천 원이 겨우 넘는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 하고 또 아무리 아끼고 절약해도 절대 ‘스스로’ 빚을 갚아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요새 젊은이들이 ‘패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파이팅’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이는 구조적 차원의 문제인데, 예컨대 힐러리 미 민주당 대선후보는 최저임금을 15 달러(약 1만 7300원)로 인상하는 버니 샌더스 예비후보의 공약을 차용했고, 호주는 올해 7월부터 최저임금을 17.7 호주 달러(약 1만 5400원)로 인상했다. 힐러리의 정책이야 그렇다 쳐도 호주는 GDP(국내총생산)가 1조 2,008억 달러로 세계 13위인 데 반해 최저임금이 세 배 가까이 낮은 한국의 GDP는 1조 3,212억으로 11위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1인당 GDP는 호주가 한국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지만 총 경제 규모로 놓고 보면 호주는 한국과 비슷한 경제 수준이라는 것이다.
또 각국의 상대적 물가 수준과 통화가치를 비교하는 구매력평가지수의 일종인 빅맥지수(Big Mac Index)에서 호주는 3.74달러로 12위, 한국은 3.59 달러로 14위에 위치해 있다. 총 경제 규모뿐 아니라 물가 수준과 통화가치에 있어서도 한국과 호주가 비슷한 위치에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러한 규모에 비해 호주의 최저임금이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의 최저임금은 비정상적으로 낮다. 애초에 스스로 벌어 빚을 갚는 ‘파이팅’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자금 대출은 많은 수의 ‘졸업반’ 대학생들이 졸업을 미루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한다. 졸업을 하는 순간 당연히 그의 신분은 학생에서 구직자, 즉 백수로 변하게 되고 지리하고 힘든 구직과 대출 상환의 길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이미 졸업을 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졸업 연기 제도를 있는 대로 활용해라.”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취업이 잘 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학 졸업자가 말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판국에서 한국의 취업난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생들이나 구직자들은 학원이나 도서관에서, 인턴 근무하는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 현장에서 각자의 이유 때문에 햇빛을 볼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한 채 살고 있다.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 햇빛을 볼 기회를 얻기 위해 그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것은 아마 밝은 햇빛이 아니라 잿빛의 빚더미이기 때문이다.
빚이 증가한 한국은 ‘파이팅’이 넘칠까?
결정적으로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 는 말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의 국가채무(나라빚) 규모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4월 5일 국회에서 심의・의결한 ‘2015회계연도 국가결산’에 따르면 지방과 중앙정부의 채무를 합친 한국의 국채는 2015년 기준 590억 5천 억 원으로 600조 원에 육박하는데, 이는 전년보다 57조 3천억 원이 증가한 수준이다.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 또한 37.9%로 전년 대비 2%나 증가한 수준 이기도 하고, 재정적자 또한 38조 원을 기록해 6년 만에 최대치를 경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5년 전인 2010년의 국가채무가 392조 2천 억 원이던 것에 비하면 매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고,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부터 3년간 늘어난 국가채무만 100조 원이 증가하기도 했다. 1인당 국가채무 또한 1천 166만 원에 이른다. 즉, 요약하자면 한국의 국가적인 빚과 적자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안양옥 이사장에 말을 적용하자면 한국 사회는 ‘파이팅’ 이 매우 넘치는 사회여야 할 것이다. 빚을 갚고 스스로를 발전시키기 위해 외부의 도움 없이 파이팅 있게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같은 ‘파이팅’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수천억 원, 혹은 수 조 원 대의 방산 비리가 발각되었다는 뉴스가 걸핏하면 뉴스에 등장하고 있고, 강남 한복판에서는 한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또 300명이 넘는 이들이 사망한 참사는 진상규명이 2년 넘게 지지부진하고 있고, 칠순의 농민이 밥쌀 개방에 반대하다 물대포에 맞고 여덟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고 있기도 하다. 철거 용역들이 세입자를 향해 소화기를 뿌리기도 하고, 많은 청년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고 말하면 ‘패기’ 가 없고 ‘노오력’을 하지 않는다며 손가락질당한다.
과연 이게 안 이사장이 말하는 ‘파이팅’ 인가? 만약 이 ‘파이팅’이 그 ‘파이팅’이 맞다고 한다면,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될 ‘파이팅’ 이다. 설혹 그게 아니라고 변명한다면, 빚이 있어야 ‘파이팅’을 한다는 그 발상은 너무도 단순하고 시대착오적이다.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말 같지 않은 말, 쓸 데 없는 어그로를 끌었다
논란이 되자 안 이사장은 자신의 발언이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배경이 좋지 않은 학생들은 국가장학금을 받아도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서 빚을 다 지고 있는데, 잘 사는 집 학생들도 부모 도움 받지 말고 대출 받아서 생활해야 한다.” 즉 부유한 부모를 둔 대학생들이 과도하게 그들에게 의존하지 말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흔히 말하는 ‘부모 도움’을 받지 말라는 것인데, 그의 말대로라면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의 부담은 일시적으로 감소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모든 대학생이 ‘빚쟁이’ 가 되라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부모의 경제적 능력 차이는 결국 채무를 상환하는 본인의 능력 차이와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으면 당연히 그 빚은 쉽게 상환 가능할 것이고, 반면에 그렇지 못하면 그 빚은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낮은 임금과 취업 가능성에 고통받고 있는데, 거기다 국가장학금 제도를 축소하고 대출을 늘리자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배울 기회를 사실상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래 주머니를 차고 출발선에 선 이들에게 납덩이를 더 채우는 격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발언과 그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해명은 ‘반값 등록금’을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파이팅 넘치게 뒤엎어 버리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장학금 수혜 기회의 감소와 채무의 증가는 그의 말대로 ‘파이팅’과 ‘자립심’ 대신 발에 묶여 있는 족쇄의 무게만 키우는 격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 중에 “님 저랑 싸울래요?” 라는 말이 있다. 진지하게 쓰는 말은 아니지만 누군가가 타인에게 무언가 실언을 하거나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한다면 “XX님, 저랑 싸울래요?” 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침 ‘fighting’ 은 애초에 ‘싸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안 이사장은 ‘파이팅’ 넘치게도, 이미 빚쟁이 신분인 수많은 청년들에게 “싸울래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어그로(aggro, 분쟁적인 관심)’ 를 끌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