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미셸 푸코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쓴 『안티-오이디푸스』라는 책의 서문을 쓰면서 한 말이다. 물론 나는 『안티-오이디푸스』를 읽기는 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글자들만 읽어 내려간 수준에서 넘어가지 못했으며 그저 푸코의 저 소개만 뇌리에 박혔을 뿐이다. 당연히 내가 앞으로 쓸 글들이 『안티-오이디푸스』의 해설이 될 것도 아니다. 다만 비-파시즘적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

파시즘은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아니다. 박정희와 히틀러, 무솔리니 모두 선거를 통해(형식적으로라도) 집권하였다. 단지 무구한 대중이 악의를 가진 그들에게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었을까? 스피노자는 공화주의자였던 정치인 더빗(De Witt)형제가 폭도 민중에게 말 그대로 산 채로 찢겨 죽은 것을 목격하고 “왜 인간은 예속을 열망하는가?”라는 급진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한동안 잊혀졌지만 1933년 나치즘의 태동기에 정신분석학자 빌헬름 라이히가 그의 책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성적 욕망의 억압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라이히에게 성 해방은 곧 대중 해방이었다. 하지만 억압과 결여를 기본 전제로 하는 정신분석학계에서 라이히의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그 역시 정신분석학자로서 자크 라캉의 충실한 제자였으나 어떤 계기[1]로 인해  라캉과 결별하고 정신분석학 비판의 최전선에 서게 된다)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라이히의 문제 의식을 전유하고 정신분석학을 비판하기 위해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을 쓴 것이다. 

‘욕망은 억압이나 결여가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라는 게 그들이 <자본주의와 분열증> 2부작에서 기본적으로 내건 기치이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라이히의 사상을 재전유하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도주하는, 대중의 해방을 위해 그들만의 정치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가타리가 평생 근무했던 La Borde라는 정신병동에서는 정신질환자와 의사의 구분이 없었다. 매일같이 로테이션을 돌려 가며 환자건 의사건 경비원이건 각자 할당된 바를 맡아 일을 했는데 환자1이 어제 청소를 했다면 의사1이 오늘 청소를 하고 경비원1이 어제 요리를 했다면 환자2가 오늘 요리를 하는 식이었다. 

정신질환자들이건 의사들이건 알바들이건 심지어 딱히 지낼 데가 없어서 며칠 머무르던 일반인들에게도 수직적 위계질서가 없이, 고정되지 않은 자리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 정신병동은 Asylum의 어원적 의미 그대로 하나의 안식처, 성역이었다.

라 보르드에서의 경험은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고안해내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기관 없는 신체"는 국가와 사회,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로서 바라보는 통념을 뒤집어 엎는다. 플라톤은 사회구성원을 머리, 가슴, 배로 비유하여 나눴으며 이는 각각 통치자, 군인, 노동자에 조응한다. 유기체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 모두가 나름의 본분을 지켜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남자(여자)답지 못하다”, “교사는 교사의 본분에 맞게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 등 일상 속에서 너무나 익숙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언명들 속에 드리워져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우리 안의 일베’가 생각난다)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코드화/탈영토화로써 해체를 시도한다. 우리를 정의하고 틀에 가두는, 사회로부터 강요 받는 배치와 접속관계로부터 탈주한다면 마치 이목구비와 사지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뒤범벅되어버린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에 나타난 몸과 같이, 비로소 우리는 사회-신체를 짓뭉개버리는 혁명적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Francis Bacon, Portrait of Henrietta Moraes, 1963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11번,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올바른 사회는 올바른 인간을 만든다. 하지만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주체는 누구인가? 마르크스 사후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은 11번 테제에만 천착한 나머지 세계를 변혁하는 ‘주체’의 문제는 간과해버렸다. 유물론적으로 봤을 때, 올바르지 않은 사회는 올바르지 않은 인간을 만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다른 데도 아닌 바로 포이어바흐 테제 3번에 있었다.[2]

[환경과 교육의 산물이 인간이라는, 따라서 변화된 인간은 다른 환경과 변화된 교육의 산물이라는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인간이며 교육자 자신도 반드시 교육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으로 나누게 되는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하다(예를 들면, 로버트 오웬의 경우). 환경의 변화와 인간의 활동의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요컨대 사회를 바꾸기 위해 인간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회는 올바른 인간을 만들지만 올바른 사회는 올바른 인간이 만든다. 지금껏 말한 비-파시즘적 삶은 올바른 인간의 수많은 조건들 중 하나다. 지금 여기의 이데올로기가 디폴트 값으로 설정하는 인간상은 ‘이성적인 성인 남성’이다. 나는 정치학도도 사회학도도 심리학도도 아닌 일개 예대 학부생으로서 ‘이성적 인간’의 대립항인(하지만 동시에 포괄하는) ‘감성적 인간’을, 내가 나의 언어로 쓰는 비-파시즘적 삶을 위한 안내서의 모델로서 제안하고자 한다.

 


[1]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가타리가 아직 라캉의 제자였을 때, 그가 집필한 기계와 구조라는 논문이 롤랑 바르트의 눈에 띄어 그가 만든 학술지 Communications에 게재하자고 제안했다. 가타리가 이 제안을 라캉에게 이야기하자 라캉이 분개하며 자신이 출간하는 학술지 Scilicet에 올릴 생각부터 했어야 하지 않았냐고 따졌다. 가타리는 스승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 바르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라캉은 끝내 그의 논문을 게재하지 않았다. François Dosse, 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 Intersecting Lives, p. 71

[2] 심광현, 『맑스와 마음의 정치학』, 문화과학사, 2014, p.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