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너무나도 각박해서 그런 것일까. 몇 년 전부터 혜민 스님과 같이 ‘힐링’을 논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휴머니즘’을 말하는 글들이 많이 보인다. 화를 멈추고,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인간다움’을 존중하는 것이 휴머니즘일텐데, 몇몇 인간을 차별하는 ‘반휴머니즘’적인 사람들에게 그 말이 가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답게 살기 어려워서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휴머니스트’가 되자고 강변한다. 그것도 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말이다.
휴머니스트 이선옥 : 모든 문제를 뛰어넘는 ‘이해’와 ‘존중’
그 시작을 끊은 것은 노동 문제를 주로 다룬 르포라이터 이선옥이다. 그는 2016년경부터 작심하고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을 비판하는 글을 계속 남기며 <의자놀이> 논란 당시 이상으로 주목받는 저자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전부터 조짐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5년 8월,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한 <너는 틀렸다고 하면 끝인가?>는 이선옥이 당시 한창 불거지기 시작하던 페미니즘적 흐름에 대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첫 번째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여성운동, 여성주의를 다수로 만들기 위해서는 얼핏 보기엔 이상한 질문일지라도 성실하게 대답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 남자 때리는 여자 얘기는 안 하느냐” “왜 여자는 늘 피해자라고만 생각하느냐” “남자의 성욕은 제어하기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라도 말이다.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남성연대나 일베처럼 “혐오와 분노로 남아 어느 순간 발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조롱말고 존중‘을 하고 ’노력해서 (반여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을) 압도‘하고 ’안된다면 공존‘을 하자고 말했다.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좀 더 참고, 정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서로를 이해하자는 말을 이선옥은 벌써부터 말하고 있었다.
이후 이선옥은 자신이 말하는 ‘이해’를 글을 통해서 무차별 폭격하기 시작한다. 2016년 4월 <직썰>에 기고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한윤형, 박가분 등이 연루되며 논란이 크게 퍼진 운동권 내부 성폭력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한창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최규석의 만화 <송곳>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이랜드 노조의 전(前) 조합원 모씨에 대한 가정폭력 논란이 불거질 때였다.
그를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선옥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삶을 파괴당한 가여운 피해자”가 어느 순간 “가정폭력 가해자, 아동학대범이라 비난”한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뒤이어 이런 식으로 “개인의 윤리를 단죄”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진보의 동력으로 그들의 고통을 이용하고 치워버린 것”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왜 논란에 올랐는지, 무슨 문제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가 약 8년 전 해고를 끝으로 복직도 하지 못한 채 이랜드 노조 활동을 중단하게 된 ‘피해자’임을 강조할 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가해자’로 몰리게 된 연유는 없이 그저 그를 ‘이해’하고 ‘연민’할 뿐이다.
<직썰>에 글을 기고한지 약 세 달이 흐른 7월이 되자 이선옥은 더욱 힘차게 자신이 꿈꾸는 ‘존중’과 ‘이해’를 내세운다. 2016년 초의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 사건과 이에 연이어서 한창 성우 김자연이 자신의 SNS에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자 넥슨 사의 게임 <클로저스>와 맺은 계약이 해지되는 사태가 발생하며 전국이 페미니즘의 물결로 뒤덮인 그 때, 이선옥은 <미디어오늘>에 <이것은 여성혐오의 문제가 아닙니다.>를 쓰면서 성우 김자연의 계약 해지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여성혐오’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다.
게임 소비자 남성-페미니스트 여성 성우, 계약자-피계약자, 진보 진영-대중, 웹툰 작가-독자로 갈등이 나뉘고, 그 갈등들은 모두 결이 다른데 이를 ‘여성혐오’의 문제로 본다는 이유에서 였다. 이선옥은 클로저스 유저나 웹툰 독자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은 소비자의 지향을 지니고 있고, 이들은 메갈리아가 “한국 남성 일반을 혐오하고 게임계에 특히 비판적”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존중하길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정의당, 노동당을 비롯한 진보 정당들이 이러한 상황을 지적하는 논평 역시 이선옥에겐 불편하다. 이미 페미니스트들이 불매 운동 등을 통해 먼저 해온 것이니 ‘불공정’한데다가 ‘가상의 적대’를 만든 것이고, 이러한 움직임에 몇몇 당원들이 불쾌해 한 것은 ‘계몽과 선민의식’에 대한 반발이 된다. 그리고 결론은 ‘공론장의 부활’이다. 그런 주장을 펼친 뒤에 정작 정의당 문예위가 이러한 논평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문예위라는 ‘공론장’이 사라진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공론장을 사랑하는 분은 자신이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어쨌든 공론장이었던 곳이 사라지는 풍경을 대체 어떻게 봤을까.
그 후로 한참 시간이 지난 2017년 1월, 이선옥은 켄 로치의 신작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불편함을 느끼며 ‘인간의 존엄’을 말한다. (<‘인간존엄’ 말하는 켄 로치 감독, 그가 놓친 ‘성 노동’>) 작품의 후반부에서 싱글맘에 안정적인 직장도 없지만, 이렇다 할 공적 지원도 받지 못하는 여주인공 ‘케이티’가 결국 성매매에 뛰어드는 것을 비슷한 처지의 독거 노인 ‘다니엘 블레이크’가 알게 되고 연민을 표하는 모습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성 노동은 딱히 연민을 받을 일이 아닌데, 켄 로치가 작품을 통해 성 노동자에게 연민을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도 잔인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분명 그렇게 작품을 해석할 여지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2017년 3월, 이선옥은 그간 조금씩 글에 조금씩 드러내던 ‘인간 존중’을 넘어 ‘휴머니스트’가 될 것을 선언한다. (<내가 프로불편러의 삶을 떠난 까닭>) 글은 <생활의 달인>을 보며 느낀 ‘좌파 친구’의 감상에서 시작한다. <생활의 달인>은 최대한 매회 등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악하거나 위험한 환경이 계속 노출된다. 그러한 모습에 대해 이선옥의 좌파 친구는 <생활의 달인>이 “장시간 노동, 위험한 환경에 노출된 실제 삶을 가리고, 화면 너머의 진실을 왜곡하는 프로”라 ‘프로불편러’스럽게 비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생활의 달인>을 비난하는 것 역시 못내 불편했던 듯싶다. 그는 <생활의 달인>에 등장하는 ‘달인’들에게 넉넉함, 편안함, 그리고 선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은 “아무와도 경쟁할 필요가 없고” 한편으로는 뛰어난 능력으로 동료를 도와주고, 다시 동료는 찬사와 우정으로 답하는 “넉넉하고 선한 분위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선옥은 선언한다. 나는 좌파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윽고 그녀는 이러한 프로그램을 불편하게 보는 좌파들이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려 들 뿐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너무나도 “인간은 다양한 존재”인데 그걸 모르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무수한 영역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혀 나가기 시작한다. 우파, 좌파, 그리고 노인. ‘태극기 집회’에 나간다고 욕을 먹는 노인들을 말하며 그는 여성혐오보다 노인혐오가 더 시급하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혐오를 개념화하고, 권리를 위해 투장할 수 있는 자기방어용 무기”가 있지만 노인들에겐 없다고 이선옥은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사람사는 세상의 좋은 가치”를 긍정적으로 보자고 외친다. 젊은이들이 가진 특유의 열정, 도전 정시, 노인의 지혜와 경륜, 직장동료 사이의 끈끈한 유대, 끌리는 대상을 향한 정념과 욕망…. 이선옥은 좌파나 페미니스트가 이러한 가치를 PC함에 가둬 ‘정형화’한다고 재차 비판한다.
이상으로 살펴봤듯 이선옥의 ‘휴머니즘’은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이해이다. 허나 그 존중과 이해는 이상하게도 운동권 내부 성폭력과 연루된 가해자를 향해 처음 발휘되었고, 공론장을 파괴하고 온갖 혐오적인 발언을 쏟아낸 이들을 향해 계속 향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드러난 빈곤을 피하여 ‘성노동자’가 된 이에 대한 연민을 비판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썼던 노동에 대한 르포들에 담긴 문제의식마저 뒤엎으며 ‘땀 흘리는 노동’에 대한 ‘선함’을 말하기 시작한다. 좌파가 세상의 가치를 정형화하는 것이 싫다면서, 청년과 노인을- 그리고 연애를 정형화한다. 그렇게 이선옥은 문제를, 그리고 논리를 뛰어넘으며 맨 위에 ‘존중’과 ‘이해’를 갖다 놓는다. 그 ‘휴머니즘’이 모든 인간을 향해 열려있는지는 오직 이선옥만 알 것이다.
휴머니스트 이서영 : 맥락의 혼란 속에서 빚어내는 ‘관용’과 ‘인정’
오래 전부터 자신만의 ‘휴머니즘’을 가다듬은 이선옥과 달리 SF 작가이자 사회 운동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드러낸 이서영(필명 ‘앤윈’)은 근래 들어 자신의 ‘휴머니즘’적인 생각을 드러낸다. 이전부터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지만, 본격적으로 공론화가 되기 시작한 것은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2016년 12월 게재된 <‘나, 다니엘 블레이크’ 그리고 ‘정중식, 보통사람’>이다.
글은 슈퍼스타K 출연으로 유명해진 ‘중식이밴드’의 리더 정중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보통 젊은 남자’들이 이렇게 산다며 쓴 글로 빚어진 논란을 말한다. “월 200이상 못 벌”고, “자신의 삶을 위로하기 위해 술은 마시거나 게임”을 하는 것은 물론 “가끔 (노가다판의) 소장님이 노래방 도우미도 불러주고” “가끔 리벤지 포르노를 보는 찌질한” 이가 정중식이 생각하는 ‘보통 젊은 남자’였던 것이다. 이미 계속 노래 가사의 여성 혐오 문제가 지적된 상황에서 해당 글은 전부터 일던 비난에 거센 불을 붙였다.
이서영은 이러한 분노에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동시에 합리화할 수 있는 문제 역시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뒤이어 그는 이것이 ‘보통 젊은 남자’의 삶이라 인정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만다. 그리고 꺼내는 것은 자신의 경험이다. 야동을 보던 자신의 오빠, 성매매를 한 경험을 당당히 말하는 자신의 친구, 성매매를 계속 하다 오늘은 성노동자만 만나고 섹스를 안 했다고 뿌듯해한 또 다른 친구,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지만 딱히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나왔다던 또또 다른 친구….
그러한 경험들을 무수히 풀어낸 뒤 그는 이러한 삶들도 있다며 이들을 혐오해선 안 된다고 말을 한다. 뒤에 이어서는 이선옥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해 말했던 비판처럼, 영화 속 다니엘 블레이크의 행동이 케이티의 존엄을 지켜준다는 이유로 “오히려 존엄을 바닥에 내앺개치고 짓뭉갰다”며 자신이 토킹바에서 일했던 경험을 말한다. 토킹바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비롯해 성매매를 하는 남성, 정중식이 글에서 언급한 남성들은 모두 ‘보편’적이고 ‘평범’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이 하는 행동에 비윤리적이라며 단죄를 하는 것은 너무 쉽고 위험하다고 규정한다. “기왕에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서 살아남아야만” 하기에 그들의 존엄을 지켜주고 인정해줘야 하는 것이다. 정작 ‘리벤지 포르노’에 자기도 모르게 출연 당한 여자들의 ‘존엄’, 노래방 도우미나 성매매 업소의 성노동자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자기와 주변의 ‘경험’만 언급하지만.
이후 이서영은 2017년 1월 <너의 이름은.>에 대한 리뷰를 통해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는 ‘휴머니즘’에서 살짝 벗어나, 신카이 마코토를 칭찬하며 그가 ‘모에’를 극복하고 있다고 말한다. (<신카이 마코토가 ‘모에’를 극복해가는 방식>) <너의 이름은.>이 일면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수동화시켜 그리고 있다며 비판받고 있지만, 오히려 그러한 표현들 뒤에는 두 남녀 주인공의 몸이 바뀌는 것이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의 연대를 그리고 있다고 이서영은 강변한다.
물론 <너의 이름은.>을 가지고 그저 신카이 마코토만 ‘여성 혐오적 표현’을 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얄팍한 지적이긴 하다. 신카이 마코토 외에도 이미 일본의 서브컬쳐 표현물은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표현이 일종의 클리셰로 정착을 한 상황인데, 단순히 이 문제를 특정 작품이나 작가에 환원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서영의 글은 몸이 바뀐 뒤 두 남녀 주인공의 달라진 행동이나, 비로소 둘이 만난 이후의 스킷에서 ‘연대’를 발견하지만, 정작 여자 주인공의 몸이 된 남자 주인공이 굳이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시퀀스를 반복적으로 집어넣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없다. 아무튼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사과했으니, 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표한 <욕망을 관용하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는 비로소 이서영이 주장하는 휴머니즘적인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사진작가 로타가 ‘로리타’적인 감성과 스타일로 작업을 한다며 생기는 비판에 대해 다시 반박을 가하는 것이 목표인 글에서 그는 한국 사회, 그리고 10대가 성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먼저 말한다. 분명 이는 맞는 말이고, 한국 사회가 처한 하나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서영은 그러한 논의를 밑바닥에 깐 뒤, ‘로리타’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고 다시 그에 대한 관용을 해야 한다며 글을 마친다. ‘로리타’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로리타는 분명 여성이 수동화된 마조히즘적인 욕망인데 이를 원하는 여성들이 있고, 따라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스스로 로리타가 되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부정하고 검열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서영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비슷한 논리를 다른 곳에서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문제적 자본을 비판하는 것도 스스로 그 자본 밑에서 ‘훌륭한 산업역군’이자 ‘노예’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으니 조심해야 하고,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를 비판하고자 해도 ‘매맞고 참고 사는 아내’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문제적인 욕망일지라도 일단 스스로 그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욕망에 대한 판단 이전에 관용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선옥의 휴머니즘이 모든 문제 위에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놓는다면, 이서영의 휴머니즘은 문제가 있더라도 그 자체가 현실이니 인정하자는 식으로 흐른다.
무엇이 그들을 ‘휴머니스트’로 만드는가?
과연 이 두 사람이 말하는 ‘존중과 이해’, ‘관용과 인정’은 얼마나 한국 사회를 휴머니즘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물론 현재 한국에서 밀물이 쓸리듯이 퍼지는 페미니즘 운동에 마냥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 이상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필요하다. 뒤이어 자신의 피해를 증언하는 것을 넘어, 사회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구체적인 상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은 오랜 시간 동안 고착화된 한국 사회의 관념과 구조를 바꾸자는 사회 운동이라는 점에서 계속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과 달리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면, 그 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구조 밑에서 어떤 이들이 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바라봐야만 한다. 허나 이 지점에서 두 명의 ‘휴머니스트’들은 구조 위에서 문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이들 조차도 따스하게 보듬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여성 혐오적인 행동이나 발언을 했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인격 자체가 ‘쓰레기’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분명 냉정해지거나 침착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 여성 혐오적인 행동과 발언은 사라지는가. 그 행동과 발언이 그를 ‘악인’으로 만들지 못하듯이, 그들이 ‘선인’이라고 해서 마냥 이해할 수는 또 없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 후반기에 10.26 사건으로 같이 사망한 비서실장 차지철이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 효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죽기 직전에 내뱉은 캄보디아의 ‘킬링필드’처럼 부마 항쟁도 쓸어버리자는 말을 넘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휴머니즘’은 그렇게 일견 보기에는 따스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말하는 ‘공정’과 ‘보편’과 달리 정작 그 휴머니즘적인 자세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말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열려있지 않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이고 이들이 이전에 행했던 사회 운동마저도 뒤집어 버리는 역설적인 결과로 작용하고 있다.
왜 그들은 자신이 이전에 했던 행동마저 부정해 버리면서까지 ‘휴머니스트’가 되려 하는가. 물론 우리가 이 둘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둘이 가진 ‘휴머니즘’에 가진 근원을 살펴보면 의외로 답은 쉬울 수 있다. 이선옥은 힘든 와중에서도 운동권 활동을 이어나갔던 이들이 여성 혐오 문제로 비난받는 것이 ‘불편’했고, 이서영은 이전부터 서브컬쳐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써 일본 서브컬쳐의 특성 중 하나인 ‘로리타’ 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불편’하게 했다. 그들은 ‘프로불편러’를 못마땅해 하지만, 정작 이러한 생각조차 ‘불편’한 감정과 기분에서 출발하고 마는 것이다.
분명 이 둘의 말대로 여성 혐오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고 단죄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 그저 한 사람을 엄벌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여성 혐오적인 사고를 지니게 된 구조와 근원을 분명 들여다 봐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 의식 없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관용’으로만 넘어가는 것 또한 문제를 덮긴 매한가지다.
마치 미국에서 흑인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래디컬한 운동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들의 삶은 소중하다)에 모든 삶이 소중하다며 ‘올 라이브즈 매터’(All Lives Matter)로 반박하는 것이 ‘휴머니즘’적으로는 온당해 보일지 몰라도 미국에서 흑인들이 당하는 인종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진정으로 ‘휴머니스트’가 되고 싶다면, 그리고 대화를 하며 공론의 장을 만들고 싶다면 문제적 상황을 그저 긍정하거나 넘어가는 대신 이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한다. 섵부른 ‘타협’이 아니라, 도리어 많은 말들과 행동, 그리고 싸움이 새로운 체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혐오 문제에 이를 대입하는 것이 정 못 마땅하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도 적폐와 ‘타협’을 하자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