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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누가 2000년의 <심슨 가족> 이 에피소드가 현실이 되리라 생각했을까?



2016년, <심슨 가족>에서나 볼법한 순간이 정말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해 모두가 ‘설마’ 트럼프가 당선되겠냐고 생각했는데, 그 ‘설마’는 ‘역시나’가 되고 말았다. 당선이 사실상 확정된 이후 트럼프의 행보에 잠시 그가 대선 운동 기간에 펼친 각종 (우려스러운) 공약과 막말은 ‘쇼맨쉽’이 아니었나는 희망도 있었지만, 그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원래 부지런하면서 무능한 사람이 최악인 법이다.)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기를 기대하기엔 너무나도 느리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행정명령’(executive order, 미국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행정집행 명령권한. 입법과 비슷한 효력을 지니지만 행정명령을 내린 대통령이 퇴임한 뒤 집권하는 차기 대통령이 이를 취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입법과는 다르다.)을 통해 자신의 공약들을 즉각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맨 먼저 오바마케어의 신속한 폐지를 촉구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이어서는 낙태 지원활동을 벌이는 국제 시민운동단체에 대한 지원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곧바로 1994년에 발효된 미국-캐나다-멕시코, 이 북미 3개국이 참여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와 일본, 호주를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국가들이 함께한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같은 자유무역 관련 국제협정의 폐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다시 뒤이어 선언된 것이 뜨거운 감자가 된 ‘반이민 행정명령’이다.

지난 1월 27일 발표된 이 행정명령은 크게 두 가지 골자를 가지고 있다. 하나, 테러위험국가 출신 난민에 대한 입국 심사를 대폭 강화할 것. 둘, 리비아, 소말리아, 수단, 시리아, 예멘, 이라크, 이란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든 비자 발급을 90일간 정지하고 난민으로 수용하는 것도 120일간 정지할 것. 그리고 미국은 거대한 혼돈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기대하며 미국에 이민을 온 중동 7개국 출신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미국에 입국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미 미국 영주권을 발급받은 사람들도 입국이 거부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민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은 IT 산업이나 육가공업 같은 3D 업종에도 비상벨이 울리게 되었다. (정작 테러리스트의 비중이 매우 높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국가는 입국 제한에 해당하지 않아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이들 7개국 출신이 아니더라도 미국에서 일을 하거나 영주권을 받고 정착한 사람들도 자신이 언제 쫓겨날지를 걱정하는 신세이다. 이미 미국 정부는 기존의 불법 체류 단속이나 입국 심사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 미국은 난민 수용 제한 인원의 수를 2016년의 8만 5천 명에서 5만 명으로 대폭 축소하는 바람에 4월 이후 더 이상 난민들이 미국 땅을 밟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2017년 1월 28일,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JFK 공항에 모인 모습.

(사진출쳐=EPA)



물론 사람들이 손 놓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미국에 입국하지 못해 많은 이들이 발만 동동 구르던 JFK 공항에 많은 사람들이 공항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며 연대의 손길을 보냈다. 연방법원 또한 발 빠르게 해당 행정명령을 중단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통과시키며 피해가 가속화되는 것을 줄이고 있다. 이에 반발한 트럼프 정부는 문제가 된 몇몇 부분만 수정한 새로운 반이민 행정명령을 준비 중에 있다.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될 때부터 어찌할지 모르던 전세계 각국은 트럼프가 온갖 부작용을 감수하고 시행을 밀어붙인 반이민 행정명령에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좌충우돌 행보에 조소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유럽 각국은 거세게 반난민 정서가 강한 국가들이 모인 곳이기도 하다. 몇몇 난민들이나 난민들이 가장한 IS의 조직원들이 저지른 범죄는 중동의 사람들, 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로 발전하여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고 있다. 물론, 한국 역시 자유롭지 않다. 어떤 의미로는 미국은 물론 유럽보다도 훨씬 이민자에 대한 정서와 대우가 나쁜 국가니까.

<코리아 판타지>, 민중미술과 만화를 결합시키며 이주 노동자를 바라보다




잠시 시간을 돌려 2003년에 출간된 만화 하나를 살펴보자. 바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가 기획을 주도한 ‘인권만화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집인 <십시일반>이다. 인권위가 출범한지 얼마 안 된 무렵, 지금보다도 훨씬 인권 감수성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 다양한 분야의 인권 문제를 알리기 위해 인권위는 영화나 만화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로 인권을 주제로 삼은 다양한 작품을 기획하기 시작한다.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첫 작품이었던 변영주, 박찬욱 등이 참여한 <여섯 개의 시선>과 함께 <십시일반>은 그 일환으로 세상에 나온 단편 만화 작품집이었다.

<십시일반>에는 박재동, 이희재를 비롯한 원로 만화가와 손문상, 조남준과 같이 당시 만평을 전문적으로 그리던 작가들을 비롯해 장경섭, 이우일, 홍윤표를 비롯해 언더그라운드 만화에서 주로 활약하던 작가들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골고루 작가진을 구성했다. 특히 박재동, 이희재는 이미 이전부터 <목 긴 사나이>나 <간판스타>와 같이 사회 참여적 성격의 작품을 그린 작가였으며 유승하와 같이 여성 운동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담아내던 작가도 작품집에 참여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집의 맨 끝에는 최호철이 그린 만화 <코리아 판타지>가 실려 있다. 자신보다 먼저 한국에서 일을 하게 된 삼촌을 찾기 위해, 그리고 가족이 진 빚을 갚기 위해 몽골에서 온 사라는 공장에서 일을 한다. 한국인 공장 관리자는 자신과 같은 이주 노동자를 욕까지 섞어가며 폭력적으로 대우하고, 다른 한국인들도 자신들을 비뚤어진 시선으로 대하기는 매한가지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단속반에 대한 공포에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처절한 환경이 겹치며 사라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고단함 속에 살아간다. 마치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었던 것처럼, ‘코리안 드림’도 허상 속에 불과했던 것이다.





종반부에서 작품을 급하게 정리하며 희망을 모색하는 식으로 끝나는 작품의 결말이 아쉽지만, 리얼리즘적인 시선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의 시선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노동 환경이 결코 좋지 않은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들은 더욱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불법 체류자’로 전락하고, 피부색이 검거나 여성일수록 이들이 받는 폭력은 더욱 심해진다. ‘한국의 초대 대통령도 하와이 해외노동자 출신’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한국인이 해외에서 받는 차별에는 민감해도, 정작 자국 내의 차별에는 둔감한 한국의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렇게 결코 쉽지 않는 분위기의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최호철의 그림이다. 최호철은 원래부터 만화가를 꿈꾸던 사람은 아니었다. 원래는 회화를 전공한 사람이었지만, 1989년 청계피복노조에 가입하거나 야학 교사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을 거친 이후 회화, 일러스트, 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종횡무진 횡단하는 한국에선 보기 드문 행보의 작가가 되었다. (자칫하면 입시 만화같은 분위기를 낼 수도 있을) 흡사 수채화 같은 화풍이지만, 동시에 만화에서 자주 접하는 데포르메(déformation, 이미지의 변형)가 더해진다. 여기에 1980년대 크게 일던 민중미술의 영향까지 합쳐지며 최호철의 작품은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를 내게 되었다.

민중미술의 현재성이라는 측면에서 <코리아 판타지>는 최근 민중미술이 빠져있는 소수자 혐오의 함정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홍성담의 <똥의 탄생>이나 이구영의 <더러운 잠>이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를 그저 질펀하게 비웃기만 할 뿐 여성 혐오적 표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것과 달리 최호철은 2003년에 이미 자신이 습득한 민중미술적인 감각을 만화를 통해 드러내며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은 물론 부분적으로는 여성 이주 노동자, 피부가 검은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이중 차별의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의 허물을 말하기 전에, 한국의 상황을 보라

<코리아 판타지>가 발표된 이후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전에도 무시하면 그만인 ‘권고’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허약한 기관이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다양한 인권 침해 문제에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회 운동의 노력으로 노동자는 물론 여성, LGBT 같은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움직임은 거세게 번져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은 제자리걸음을 넘어 조금씩 후퇴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2007년, 여수외국인보호소에서 화재가 발생해 10명의 이주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17명이 중상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새로 지어진지 2년 밖에 안 된 시설이었지만, 기본적인 안전장치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한국의 외국인보호소는 ‘보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달리, 흔히 ‘불법 체류자’라 불리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이 추방되기 전 임시적으로 구금하는 ‘수감시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수외국인보호소는 화재로 심한 부상을 당해 입원해있는 이주 노동자들에게까지 수갑을 채우기까지 했다.

이주노조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의 거센 항의 끝에 국가는 희생당한 이주 노동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였고, 출입국관리국장이 사임했지만 여전히 한국이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변하지 않았다. ‘불법 체류자’로 취급되는 미등록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 단속은 물론, 각지에 있는 외국인보호소에서는 계속 인권침해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된다. 물론 애초부터 문제의 근원이었던 기업 친화적인 이주 노동자 정책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주 노동자들에게 더 불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상황이다. <코리아 판타지>가 발표되고 일 년 뒤인 2004년에 시행된 ‘고용허가제’는 사업주의 허락 없이는 사업장 이동을 할 수 없도록 이주 노동자의 손발을 묶어 두었다. 사업주가 임금을 체불하거나 각종 폭행, 성폭력을 저질러도 노동자가 이를 증명해야지만 사업장을 옮길 수가 있다. 게다가 이주 노동자 자신의 의지로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고, 퇴직금조차도 출국 후에야 지급하는 식으로 법을 개악하였다. 그나마 2015년 오랜 시간 동안 끈 법정 소송 끝에 법적인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던 이주노조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 의해 설립이 인정된 것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정부는 이주 노동자 문제에 대해 개선의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2017년 2월 6일, 여수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10주기를 맞아 열린 추모기자회견의 모습.

(사진출처=MWTV이주민방송)



오히려 정부는 최근 ‘계절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농업, 축산업, 어업 분야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최장 90일간 계약할 수 있게 만드는 제도를 시행하면서 이주 노동자들의 착취를 더욱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드는 상황이다. 여전히 사업장은 옮길 수 있으며, 심지어는 몇몇 계절근로자 제도가 시행 중인 지역에서는 근로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임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휴식 시간도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 환경은 기본이다.

노동자가 아닌 다른 이주민들의 상황도 열악하기엔 매한가지이다. 농촌의 급격한 몰락과 맞물려 국제결혼이 계속 증가하고 있지만,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이주민 여성이 상습적으로 겪는 폭력 문제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점차 이주민 2, 3세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하고 사회에 속속 진출하고 있지만 백인이 아닌 이주민들에게 편견이 강한 한국 사회는 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정부는 뚜렷한 실태 파악이나 대처 방안을 세우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마당에서 한국이 과연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놓고 왈가왈부할 수 있는 처지가 될 수 있을까. 몇몇 매체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이 재미교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걱정하지만, 정작 한국은 이미 오랜 시간동안 이주 노동자들을 산업의 중요한 동력으로, 결혼 이주 여성을 농촌 문제와 출산률 문제의 해결책으로 활용만 할뿐 이들이 응당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국가기 때문이다. 단지 ‘행정명령’이라는 말로 발표되지 않았을 뿐, 한국은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담고 있는 반이민자 정서가 만연한 곳이었다.

그렇게 200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미약한 힘으로나마 말하고자 했던 이주민의 문제는 2017년 더욱 심화된 형태로 한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곧 다가올 대선이 과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이주 노동자들의 현실을 더욱 억압하는 ‘고용허가제’는 노무현 정권 초기인 2004년에 도입되었다.) 한국 언론들이 이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쳐다보는 사이, 이미 한국은 불이 활활 타오르다 못해 한 줌 재도 남기기 어려울 정도로 문제가 타오르고 있다. 한국인들이 최소한 반이민 행정명령 문제에 있어 심각하게 바라봐야할 곳은 미국도, 유럽도, 중동도 아닌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나라, 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