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와 판다, 바나나가 그려진 그림을 제시하고 셋 가운데 서로 관련 있는 것을 두 개 골라 묶어보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묶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동북아시아인과 서양인(주로 영미권)들의 대답에 아주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다수의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은 반면, 서양인들은 대부분 원숭이와 판다를 묶은 것이다.[1] 후자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했던 종적 범주에 입각하여 묶은 것이라면 전자는 양자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들뢰즈 철학을 참고하여 해석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화학으로부터 ‘몰’mole과 ‘분자’molecule를 그들의 정치철학적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몰은 기체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분자들을 대략 6x10^23(아보가드로 수)개로 묶은 단위이다. 분자들 개개의 움직임과 몰 단위의 움직임이 동일할 수는 없는데, 따라서 분자들의 고유한 움직임이 몰적인 운동에 환원된다.[2] 지극히 통속적인 이해로써 현실정치에 대입하여 단순화하자면 몰적인 것은 전체주의적인 것이며 분자적인 것은 개인주의적인 것이라 해도 되겠다.[3]
비약적인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서양인들의 묶음은 포유류라는 몰적 동일성에 의거한 선택이다. 지금 보편적으로 통하는 의미의 과학의 시발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동식물들을 범주화하여 분류한 것을 따라 묶은 것이다. 문재인과 김무성은 완벽히 다른 두 사람이지만, 둘 모두 인간이며 영장목, 포유강, 척삭동물문, 동물계에 속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로써 둘의 차이는 사라진다. 반면 보르헤스가 인용한 ‘중국의 한 백과사전’은 상식 밖의 분류체계를 취한다. 여기서는 동물이 이렇게 분류된다. 황제에 예속된 동물들, 박제된 동물들, 훈련된 동물들, 떠돌이 개들, 미친듯이 날뛰는 동물들,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들…… 몰적 동일성에 포섭되어 있던 개별의 분자들이 해체되어 이질적인 것들끼리 한 데 묶이는 것이 리좀rhizome적 연결이다. 이를테면 리좀은 몰과 분자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상태이며 하나의 요소만 달리 하면 전체의 성질이 달라지는 질적 다양체의 모습을 띤다. 동양인들의 선택은 리좀적 연결이다. 서로 계界부터가 다른 원숭이와 바나나를 이으려면 수목樹木형(arborescent) 모델의 과학적 분류체계에서는 종, 속, 과, 목, 강, 문, 계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 내려오는 기나긴 여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나무/뿌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서 리좀형 모델에서는 이질적인 점들을 인위적으로 이을 수 있다. 보르헤스가 제시한 근거는 매우 작위적으로 보이지만 원숭이와 바나나를 잇는 근거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는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해 바나나는 원숭이의 코나투스를 증진시켜주는 존재이다. 여기서 둘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 바로 감응이다.
이렇듯 감응은 상이한 것들을 같은 것들로 묶거나 동일한 것들로 여겼던 것들을 상이한 것들로 해체한다. 맑스는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안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 어떤 존재가 어떻게 규정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배치, 연결 관계이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이다. 짐수레를 끄는 말과 황소 사이의 거리, 짐수레를 끄는 말과 경주마 사이의 거리 둘 중 무엇이 더 가깝느냐고 묻는다면 전자가 더 가깝다고 답할 것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비록 같은 종의 동물이라 할지라도 짐 끄는 말과 경주마 둘을 아주 이질적인 것으로 구분 짓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사회-통념이 취하기를 종용하는 특정 연결 관계에만 머무는 데 만족한다면 잠재적 역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인간으로 남게 된다는 것은 이전 글에서 여러 번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이질적으로 보이던 것들과의 연대이다.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사이의 거리는 한국인 노동자와 강남 부자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할 수 있는 것들’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국적 혹은 민족성이라는 몰적 동일성이 사실은 매우 허약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여전히 이주 노동자, 난민, 다문화정책 등에 대하여 매우 냉담하고 잔인한 견지를 취하고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 새누리당을 비판하며 민주진보시민을 참칭하는 자들이 이주 노동자, 무슬림 등의 문제들에 한해서는 파쇼적인 언행을 보이는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민족주의에 의거한 수직적 통합으로부터 계급에 따른 수평적인 범국가적인 연대로의 이동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오직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신념으로 합리적 소통과 교육에 힘쓰는 계몽주의적 접근이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증명된 바다. 오늘날 더욱 심화되고 있는 혐오 정치와 공포 정치에 맞서는 방법이 무엇일까? “혐오하지 말자”, “무서워할 것 없다”고 백날 외쳐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 천엽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몸에 좋고 맛있는 거라며 입에 억지로 넣으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먹기 싫은 것은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현실 정치에서 진보정치가 접근 방법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미시-파시즘과 체화된 이데올로기, 푸코라면 생명 권력이라 불렀을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학제간 연구가 비교적 최근 들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현대 정치학에서도 이른바 정동적(감응적, affective) 전회가 진행되는 추세이다.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가 메시지다’라고 했듯이, 이제는 정치인들의 정책과 메시지에 천착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는 레토릭, 제스쳐, 은유, 내러티브 및 스토리텔링, 매스 미디어를 다각적으로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 정치의 프레임이 어떻게 우리의 감응을 자극하는가, 어떻게 테러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며 어떻게 정치혐오, 여성혐오, 소수자혐오를 부추기는가.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강조하듯이 프레임을 분석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 변혁이다.
[2] “’분자적인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개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통계적 평균에 의해 표시되는 것과 동일하게 움직인다고 가정되는 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를 ‘몰’이라고 하지요. 이 경우 분자적인 고유한 움직임은 평균에서 벗어난 ‘편차’일 뿐이고, 그런 편차의 분산을 통해서 평균에 근접한 정도로 포섭되는 움직임일 뿐입니다.” 이진경, 『노마디즘 1』, 휴머니스트, 2011, 608쪽.
[3] 물론 이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축척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한 명의 개인이 통일된 유기체로서 몰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